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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두고만 볼 것인가

솔개우담 2012. 9. 22. 08:51

                                                                                                                                                     

 

                                                                                         회장 송은섭 (헤공)

 

 얼마 전에 민족뿌리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해정당국에서 단군성전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 우상숭배라는 발언과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냐는 폭언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선엄한으로써 비단 기독교계 뿐

아니라 학계를 위시하여 여러 각계각층에서 분노와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었다.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일부 양식 없는

기독교인들의 망발과 횡포는 비단 단군성전 건립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에 있어서는 더욱 삼한 현상이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최근에 절로 소풍을 온 어린이들이 法堂을 가리키며 저속에 마귀가 들어 있다고 하는가 하면

거리에 지나가는 스님을 보고 사탄이 지나간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한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마귀니, 사탄이니 하는 말을 누가 가르쳤는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또한 몇 해 전에 현직목사가 부흥회에서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지옥가는 지름길의 안내서라고 하고 존엄한 불상을

그들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우상과 같은 것쯤으로 발언해 이에 청년 불자의 자해소동까지 유발케 하였고, 또한

문교부에서 재정한 도덕·윤리교과서에다 불교와 유교 같은 전통사상을 봉건시대의 유물로 낙인찍어 내리 몰아쳤고

기독교만이 유일한 고등종교인양하는 발언을 하여 현 유일한 승려국회의원인 김용우스님이 특정한 종교에 편애되지

않는 순수한민족적, 호국적, 역사문화적인 차원에 근거를 두고 현교과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도록 시정촉구를

행정당국에 건의를 했다 한다. 이외에도 국보급 불상에다가 붉은 페인트 십자가를 그려 넣는가 하면, KBS의 종교

음악시간에는 거의 기독교의 찬송가를 내보내는 것이 일쑤이고, 농촌에서는 교회 품앗이를 따로 조직하여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면 이에 넣어주지 아니함으로써 불교를 믿는 농민들을 당혹케 하는 둥, 갖가지 별스런 형태의 횡포들이

곳곳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몰지각한 일들은 무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횡포이지 결코 양식 있는 전체 기독교인들의

의사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전체 기독교인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오판해서는 안 되고 또한

기독교 자체가 원래 잘못된 것처럼 속단해서도 아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일부 기독교인들의 소행이지만

이를 그대로 묵과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무지한 어린이들의 불장난으로 우리의 큰집이 태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이야 언젠가는 꺼지겠지만 그 집에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더욱이 그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갓난 아들과 딸들을 다 태우고 그분이 꺼진다 하면 어찌되겠는가?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들 일부 무지몽매한

 기독교인들의 횡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두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불교라는 큰집이 그들의 억지 횡포에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길임을 명시해야 한다. 또한 이 문제는 단순히 기독교인들과 불교인들을 떠나서 우리

사회의 전체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라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에 승속을 막론하고 공부를 좀 했다는 불교인들이 불교의 空을 不思善, 不思惡이라고 하여 또는 악과 선을

다 포함한다 하여 윤리적으로 혼돈을 유발하여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또한 因緣과 因果應報같은

사상들을 곡해하여 모든 것을 因緣의 소치라 돌려 스스로 행동하기를 꺼려하고 이교도들의 무지에서 시작한

배타 독선적인 불장난 같은 횡포를 그저 감수하는 것으로 미덕을 삼으려 하고 있다. 즉 가만히 앉아 있어도

惡은 벌을 받아 제멸하고, 正義가 언젠가는 저절로 굴러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점잔만 빼고 앉아있으니 이는

마치 반벙어리들이 거짓웃음을 웃으며 거짖꽃을 들고 앉아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우리 주위에 이러한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태는 더욱더 악화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불교를 죽이는 정신이지 결코 불교를 살리는 정신은 아니다.

 분명코 문제해결은 어떤 관념적인 푸념과 개념의 유희가 아닌 현실적인 행동으로 모든 것을 善에 대한 의지가

서고 보면 분명 因緣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또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불교의 자멸을 막기 위해 이러한 惡을 보고 空이니 因果이니 해서 惡을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불교인들의

어쭙잖은 병폐부터 먼저 척결해야 한다. 그리고 난후에 이교의 횡포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 이를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 아무리 어린학생이라도 스님을 사탄이라고 하고 법당을 가리켜 마귀의소굴이라고

말하는 어린이들이 있다면 이를 그냥 웃어넘기지 말고 그 어린이가 그렇게 말하게끔 된 동기를 알아보아야 한다.

즉 구체적으로 기일이 학교 앞에서 일어났으면 그 학생의 담임을 만나 물어보아서라도 그 학생이 다니니 교회 목사님을

만나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동기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분명히 파악하여 본인이 직접 계도할 수도 있겠고

또한 양식 있는 신부님이나 목사님을 찾아가 무지한 기독교인들을 아니 기독교의 탈을 쓴 마귀들을 박멸해 주도록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다. 세상에 어느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이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에게 스님을 사탄이라고, 법당을

마귀의 소굴이라고 가르치겠는 가다. 사실 지금 이 시각에도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이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에게 스님을

사탄이라고, 법당을 마귀의 소굴이라고 가르치겠는 가다. 사실 지금 이 시각에도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그러한 사이비 기독교인들을 없애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문제들을 하나씩 실제행동으로 풀어나가자면 자연히 모든 것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정작 유의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적어도 안에서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밖에서 보는 우리 불교의 병폐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교도나 타인이 생각할 때 한 마리의

작은 미물의 생명까지도 아낀다고 하는 불교인들이 그들의 종파의 전 익이나 조그마한 이권다툼으로 폭력을 서슴지

않고 살인까지 자행하는 고질적인 병폐이다. 원래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못된 짓을 함부로 걸어오는 것도 우리

쪽에 먼저 더 큰 원인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어느 단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먼저 조심스럽게 우리는 우리의 안에 있는

 우리의 惡된 모순부터 점검해야 한다. 이렇게 善에 대한 우리의 투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 꼭 종교를

떠나서라도 상대 방안에 있는 善이 우리의 善에 대해 호응해 오는 법이다. 그럴러면 우리는 우리의 惡을 스스로

정화하지 않고서는 모처럼 일부 몰지각한 무지인 들을 고발하는 정신도 추잡한 서양의 종교전쟁 같은 것을 부추기는

도화선이 되고 마는 대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불교를 격하시킨 것이 없나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설 법시나 포교지에

 발언을 할 때 우리 불교의 팔만대장경의 주옥같은 구절은 놔두고 이교의 경전구절을 첫 서두나 제목에 사용하여

 이교의 빈축을 사는 점들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고 이제 이 글들을

 요약하자면 싸움은 바로 종교의 탈을 쓴 마귀와 이를 묵과하지 않는 善에 대한 투철한 意志와의 싸움이지 어떤

 기독교와 불교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족을 붙여 부설하자면 종교의 탈을 쓴 마귀는 어느 한 쪽에만

있지 않고 바로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있다. 마찬가지로 善에 대한 투철한 의지도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善에 대한 의지의 싸움이지 종교와 종교 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善에 대한

투철한 의지로 보다 적극적이고 생동하는 불교인으로 死者를 소생시키는 것과도 같은 원력으로 불법의 수호를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