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송 은 섭(불교학과)
Ⅰ
오늘의 한국사회를 종교시장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현 우리나라의 종교현황은 불교를 비롯하여 기독교, 이슬람교,유교, 천도교, 무속 등 여러 가지 종교가 난립해 있고 또한 이들 각 종교가 주장하는 교설도 다양하다. 기독교에서는모든 것을 여호와가 창조했다고 하고, 유교에서는 음양의 원리에 의한 것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오직 마음이 일체의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이어야 할 것인데도 각 종교의 주장들은 서로 다르기만 한가 ?
과연 이러한 종교 백화점 같은 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것이 참 종교인가를 알아 어느 한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이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냥 무작정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믿을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각 종교의 진의를 알아보고 믿을 것인지? 물론이 문제는 각자 개인에게 딸린 문제이겠지만 전자의 경우처럼 무작정 선택하여 믿는다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할 적에 우리는 먼저 상대가 믿음직한가의 진위를 가려 고르듯이 종교선택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판단의 어려움이 뒤따르게 된다. 우선 아직은 믿음의 단계에도들어서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종교의 교실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믿어 보기도전에 교설 내용의 진의성을 알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설사 불완전하다고 사정을 한다해도 근본적적으로 선악이나 眞, 假와 같은 것을 전적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의 知的인 능력이 진적으로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필자는 진정한 믿음을 위해 불교라는 종교가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교설의 진리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생각한다.
Ⅱ
부처님이 생존했던 BC 5~6세기경의 인도사회는 「梵」이라는 신적 존재를 우주의 창조주요 또한 본질로 믿는유신론적인 브라흐마니즘이 있었고 이에 맞서 세계의 근원을 몇 개의 물질적 요소로 보는 沙門들의 다양한 종교사상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부처님은 당시 여러 계통의 종교를 두루 믿어보고 또한 그 사상들을 몸소 닦아 그 궁극적인 경지들을 체험해 보았다. 물론 과거의 그때 인도사회와 현시대의 종교현황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근본적으로 현대와 그때 인동의 종교상황은 별반 다를 게 거의 없다고 하겠다.
우선 브라흐마니즘의 汎神論과 기독교의 우일신의 관념은 크게 다를 것 같지만 브라흐마니즘의 원천이 되고 있는리그베다에는 유일신의 관념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물질을 地水花風의 四大說로 나눈 것과 현시대의 과학에서보는 103개의 원소설과는 어떤 분석기술에 의한 차이지 철학적 사유의 패턴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때 당시의 여러 종교를 믿고 수행해 보았던 부처님의 종교적 求道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들이 어떠한 것이 과연 믿을만한 종교인가를 문제로 삼았을 때 일어나는 판단의 어려움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준다. 여기에서이 문제는 우리가 겪어야 할 종교적 갈등을 대신 겪어주셨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은 당시 여러 종교를 편력한 뒤 그들 종교들이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체득한 뒤 그들과 헤어져 붓다가야의 조용한 숲을 찾아가 그곳에서 독자적인 禪定에 잠겨 마침내 해탈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나가 설한 것이 불교로써 이러한 불교의 전도과정에그는 자신을 항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반해 바라문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신의 아들임을 자처하였고 신과 교통하고 제사를 집행할 수있는 것도 자기들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서 부처님과 바라문중 누가 진실을 말하였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어서 부처님은 그가 깨달은 진리는 일체의 언어와 사유를 초월한 것으로 너무 깊고 미묘하여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부득이 언어와 사유를 동반한 점진적 방편을 설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이러한 자기의 언어적 교설은절대적 진리가 아니니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그 뜻을 생각하라고 간절히 설하였다. 그러나 바라문들은 어떠했는가?
자기들의 베다 성전은 하늘에서 들은 「스루티」 곧 신의 계시임을 강조하고 그곳에 쓰여 있는
일자 일구도 모두가 다 절대적인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자기의 교설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미묘한 방편으로 그러한 法을 들은 자가 누구나 다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열반에 이르는길은 분명히 있고 그것을 자기가 가르쳐 주지만 가고 안가고는 각자의 일로써 자기인들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고 불교에 대한 믿음으로 다 병이 낫습니까?라고 世人들이 물었을 때 부처님은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반해 바라문들은 신에 대한 기도와 제사를 통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바라문들의 주장과 부처님의 자세는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바라문들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신을 섬기는 어느 종교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원래 기독교의 유일신인 여호와는 옛날 엘사따이산의 양치기의 수호신에 불과 했는데 모세의 光氣가 접한 호렙의 靈이 첨가해 곧 가나안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軍神으로 변했고 그 뒤 엘리야의 호세야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고 바빌로니아에서 사탄을 도입함으로 기독교의 여호와는 완성되었을 뿐이다.
본자는 신 중심의 바라문이 성행하고 있는 인도사회에서 당시 끊임없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法音이 널리 퍼져나갔던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불교의 어떤 진실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불교 교설의 진실성들을 우리는 먼저 여실히 확연하게 알아야 함은 물론 주위에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이 여러 종교가 범람해 있는 상활에서 어떠한 것이 참답고 믿음직한 종교인가를 알아내는 어려움이 위와 같은 방법으로 다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인연을 통해 불교를 선택함은 본인은 물론 나아가서는 믿음을 일으킨 사람 각자의 크나큰 복이라 하겠다.
일단 선택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 그에 대해 전적인 믿음을 일으켜야 함은 당연한 순서이다.
믿음에 대한 요청은 대승경전에 더욱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다. 金剛經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實相을 생하리니, 마땅히 알리. 이 사람은 가장 希有한 공덕을 성취하느니라」고 설해져 있다. 그러나 「모든 법의 그러함은 너무나도 심오하고 미묘하여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다 알 수 있을 뿐, 그밖에 사람은 심지어는 보살들까지도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 」이라고 法華經은 설하고 있다(卷 2 方便品) 그러면서도 여러 보살 중에서 믿음이 뛰어난 자는 제외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가 아무리 들어가기 어려워도 「믿음」으로 능히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보살의 求道과정을 자상하게 설한 것이 華嚴經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보살은 무엇보다도 佛法僧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일으켜야 된다.
하지만 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불교의 믿음과는 그 성질이 크게 다르다. 신 중심의 종교에서는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主요, 사람은 그에 따른 피조물로서 마땅히 從이 되어 그의 뜻에 따라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거나 신이 되려고 한다면 이는 용서받지 못할 교만이요, 최고의 죄라고 못 박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한 최상의 진리를 각성한 사람이요, 중생은 깨우치지 못한 者이므로,마땅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해야만 절대적인 진리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데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오히려 부처가 되지 않으려는 것을 교만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 모든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궁극적으로 부처와 똑같은 知覺을 開示하고 吾人케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는 것 」이라 하였으며 또한 그 깨달은 진리는 너무나도 깊고 미묘하여 일체의 언어와 사유를 동반한 점진적 방편을 절실히 설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였다.
이러한 자기의 언어적 교설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저 언덕에 건너간 다음에 마땅히 버려야 할 뗏목과 같은 것으로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그 뜻을 생각하라고 간절히 금강경에서는 설하였고 또한 지금까지 설해 온 여러 가지 三乘의 교법은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자 감히 發心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교만이요 (卷 1 方便品 ) 죄요, 무지라고 규정하고 있다. (無量水莖)
따라서 불교에서의 믿음은 항상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는 發心과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이것은 곧 종교적실천의 行으로 옮겨져야만 한다. 화엄경은 이런 뜻을 잘 표현하여 十住 다음에 十行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불교적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과 發心 行을 하나로 연결한 종교적 생활이라 말할 수 있다.
Ⅲ
불교의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그 개념이 명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것이 제대로 인식되고 제대로 행해지고 있을까?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불교적 信行을 예를 들어 문제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친근한 신앙형태로는 우선 불상 앞에서 예불, 공양, 기도, 발원하는 것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불상을 한낱 문화재나 예술품 심지어는 우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앙심을 퇴진시키는 일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순수한 신앙심에 불상이 단순한 조형물로 비치는 일이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조형물이 아니요, 부처님과 같은 것이니 불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경하는데 에서부터 매일 신앙생활을 시작함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부처님의 이미지를 촉발시켜야 할 할 것이다.
둘째,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괴로움에 부딪쳤을 때 불교인은 누구나 관세음보살을 염한다. 그리고 死後에는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원해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염불이 너무 타력신앙의 방향으로 흘러 기독교적인 구원의 관념과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어있다. 위에서 거론했던 불교적 믿음과 發心의 본질적 의미는 어떤 경우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관음신앙을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불교적 믿음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彌陀신앙 또한 정토왕생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發心이라는 것을 항상 염해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大, 小乘을 구별하여 소승을 부정하고 , 조선조 500년의 억불정책 아래서 敎學의 침체를 가져와 아니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이 깊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과 교는 근본에 있어서 하나이며, 대 소승 또한 一佛乘을 임시 방편으로 식별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럴진대 무엇보다도 불교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아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 수행하여 善財童子와 같은 보살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적 신앙생활이라고 본인은 보고 있다. 이제 끝으로 법화경의 말을 옮겨 적으며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너희들은 이제 모든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기뻐할지어다」
-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전북불교대학회지 제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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